박성우의 '시가 어려운 당신에게' 124
“이 좋은 햇볕 그냥 보내면 죄짓는 거다” 이종형 시인의 「10월」은 하던 일 잠시 밀치고 바깥으로 나가 가을볕을 쬐다 오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네요. “첫눈이 내리려면 몇 밤이 남았는지 헤아리듯” 막연하게, 장독대를 반짝반짝 닦고 있을 외할머니 손이며 창호지에 바를 풀을 찍어 먹어보는 아이의 손을 가만히 잡아보고만 싶습니다.
10월
이 좋은 햇볕 그냥 보내면 죄짓는 거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가 하신 말씀
뒤란 장독대 반짝거리게 닦아놓고도 햇살은 남아
누렇게 변색된 격자 창호문에 새 창호지 바르는 날
밀가루 풀을 몰래 손가락으로 찍어 먹다 혼나던 날
긴 겨울밤을 위해 문풍지를 길게 남겨둬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 날
흰 창호문은 결 좋은 햇살에 말라가고
첫눈이 내리려면 몇 밤이 남았는지 헤아리듯
손가락으로 톡톡 퉁기면
동동 작은 북소리 울리던 날
아무것도 한 일 없어 죄짓다 말고
문득,
당신 생각에 눈시울 붉어지는 오늘 같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