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우의 '시가 어려운 당신에게' 126
가을 바닷가 모래밭에 누군가 써놓고 간 토막말이 있습니다.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 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토막말 근처에는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는데요,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밀물이 밀려오면 모래 위에 적힌 말은 곧 지워지겠지만 보고 싶은 마음은 끝내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토막말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