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숲에서 시작된다. 도심의 꽃나무가 여린 봉우리를 터트리기 훨씬 전부터 깊은 산자락의 야생화는 봄을 맞을 준비를 한다. 거친 땅과 매서운 바람을 이기고 피어난 강인한 생명력은 인간이 키우고 다듬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봄날의 숲길이 꽃길만큼이나 화려한 색깔을 지녔음을 직접 걸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다. 하늘나라 선녀들이 아이들과 함께 내려와 노닐다 갔다는 선자령(仙子嶺)은 완만한 숲길과 이국적인 초원이 어우러져 봄날에 걷기 더없이 좋은 길이다.
옛 대관령휴게소에서 시작해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선자령 풍차길은 강릉 바우길의 첫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바우길은 강릉사람을 친근하게 부르는 ‘감자바우’에서 따온 이름이기도 하지만 바우(Bau)는 바빌로니아 신화에 등장하는 건강의 여신이기도 하다. 때 아닌 봄감기로 며칠을 앓고 난 끝에 바우길을 떠올린 것도 그 치유의 힘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선자령으로 오르는 마지막 바윗길을 지나니 웅장한 능선을 따라 하얀색 풍차들이 기운차게 돌아가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이곳에 오르기까지 들인 노력에 비하면 과분할 만큼 아름다운 경치다. 잠시 할 말을 잃고 서 있으니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돌았다. 멀리 백두대간을 돌아온 바람은 힘차고 시원했다. 꼿꼿하게 몸을 세우기보다 마음껏 흔들리며 선자령의 거센 바람에 맞서는 풀포기들을 나는 한참이나 감동스럽게 바라보았다.
찌뿌듯하던 몸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선자령의 세찬 바람 탓인지 기침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그래도 섣불리 약의 도움을 받기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고 싶었다. 채소와 과일을 챙겨먹고 규칙적으로 잠들고 일어났다. 틈틈이 따뜻한 모과차로 목을 달랬다. 독하기로 소문난 오뉴월 감기는 어느샌가 기세를 잃고 사라졌다. 그렇게 바우길의 푸른 숲과 선자령의 맑은 바람에게서 배웠다. 치유의 힘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