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들이라면 으레 소설을 많이 읽겠거니, 책을 읽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겠거니 생각하겠지만 나는 사실 문자를 읽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정직하게 얘기하면 힘들어하는 쪽에 가깝다. 글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보다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쪽을 훨씬 더 좋아한다. 다독하는 작가는 분명히 아니고 편식하는 작가에 가깝다. 편식이라고도 자신있게 말하기 어려운 것은 인터뷰를 통해 곧장 좋아한다고 말했던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조차도 대표작만을 겨우 읽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작가라고 전면에 내세우기는 애매하다.
독서경력이 심하게 가난해서 작가들이 모이는 자리에 갈 때마다 책 얘기가 나오는 것이 스트레스가 될 정도였고, (이렇게 공식적으로 말해버리고 나니 차라리 속이 시원하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백과사전에 써 있는 요약된 줄거리를 읽고 독후감을 써낼 때마저 있었다. 베껴 쓴 줄거리가 잘못되어 있어서 낭패를 본 적도 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책과 많이 친해진 셈이지만 다른 작가들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가난한 독서이력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책과 담을 쌓고 지낸 것은 아니다. 어떤 시기에 책은 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친구들이 입시공부에 열을 올리던 시기를 나는 소설을 읽으며 버텼다.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주변사람들에게 마음을 끄집어내기 어려웠던 (지극히 내성적인) 나에게 소설은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당시에 주로 읽었던 것은 한국중단편모음집이다.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와 조세희의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김승옥의 「무진기행」 같은 단편들을 읽었을 때의 희열을 아직 기억한다. 교실 한 개 정도 크기의 작은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빌려 읽다가 서점에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갔던 날도 기억난다. 서점 책장에 빽빽이 꽂혀있던 책들을 바라보면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성석제의 「어린 염소와 40마리의 도둑」을 읽으며 낄낄댔던 기억이 난다. 소설과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른 친구들이 수능문제집을 풀 때,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소설을 읽고 연습장을 꺼내 짤막한 이야기를 끼적였다.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에 외국소설들을 접했다. 나는 국문학과에 지원했는데 교재를 한 권도 사지 않을 정도로 수업에는 관심이 없었고, 문학동아리 활동에 재미를 붙였다. 선배들은 무라카미 하루키나 레이먼드 카버, 존 치버 같은 작가들을 좋아했는데 나도 그 물결에 휩쓸려 그들의 소설을 읽었다, 레이먼드 카버나 존 치버 같은 경우에는 한 때 깊숙이 매료되었었고 단편의 미학을 배우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친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작품들이 나 자신의 중추를 건드렸는가, 라고 묻는다면 망설이게 된다. 나는 위에 열거한 작가들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그들에게서 선천적으로 나와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내가 나와 비슷하다고 느끼는 작가들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나 사라 워터스, 이언 매큐언 같은 작가들이다. (『재주꾼 리플리』 『끌림』 『이런 사랑』 같은 작품을 좋아한다.) 미야베 미유키, 루스 렌델, 제임스 발라드의 작품들에게도 이끌린다. (『화차』 『활자잔혹극』 『크래시』 역시 매우 좋아하는 작품이다.) 밝고 명랑한 친구들과는 어쩐지 친해지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이런 부류의 이야기들이 더 납득되고 관심이 갔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는 내가 위에 열거한 작가군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위에서 열거한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음의 요소들이, 음흉함이나 음습함, 음탕함 같은 것들이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에게는 없다. 하지만 나는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의 첫장을 펼치자마자 본능적으로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친밀감을 느낄 문장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대표적인 장면을 꼽자면 브래드쇼와 마고의 대화를 들 수 있겠다. 그는 대화 없이 대화하고, 상대방의 생각을 완벽하게 이해한다.)
두번째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내가 그의 생각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 같았다. ‘바보같이 굴지마.’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한테 맡겨. 알지도 못하는 일에 끼어들려고 하지 말라고.’
‘좋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에게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알아서 하세요. 당신 책임이니까.’
그리고 약간 화가 나서 일어나 라운지 밖으로 나왔다. 나는 이 침묵의 대면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235p)
‘베를린 이야기’ 1권인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의 서두에서 브래드쇼는 노리스 씨와의 첫 만남을 묘사하면서 “그는 내가 자기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라고 진술하는데, 이 진술에는 꽤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위에서 인용한 대화와 마찬가지로 말로 드러나지 않은 상대의 생각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 소설은 전지적 시점이 아닌데도 초반부에는 종종 이런 식으로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화자인 ‘나’가 서술한다. 언어라는 매개없이 타인을 거의 직접 만난다.
“그는 자신이 도를 넘어선 것이 아닌지, 지겨운 사람 혹은 사기꾼에게 자신을 갖다바친 것이 아닌지 생각하는 중이었다”라는 식의, 1인칭 시점에서는 불가능한 형태의 진술이 나타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그는 내가 진담으로 말하지 않았음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표시를 했다.” 이 문장은 소설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었는데, 이 문장이야 말로 가장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다운 표현이다. 다른 작가들이라면 타인의 말 자체를 따오거나 표정이나 행동을 묘사했겠지만 이셔우드가 타인과 소통하는 방식은 ‘표시’에 가까워서,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어긋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권의 소설이 오해가 작동하지 않는 세상을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 현실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이, 소설 속에 자신의 이름을 넣는 방식으로 존재하려고 했던 하나의 시도였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이 책의 서평을 쓰게 되었을 때 나는 대충 위와 같은 내용으로 지면을 채웠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두 번째 서평인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베를린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는데, 일년 전의 첫 독서가 아전인수식 독해에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일부 서술에서 그런 시도를 엿볼 수는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고, 위에 인용한 무언의 대화 장면도 전적인 오해로 밝혀진다. 심지어 그가 침묵의 대면을 나눈 상대는 마고가 아닌 다른 엉뚱한 사람이었다.
다시 읽은 베를린 이야기는 전후시기의 독일인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책장을 덮었을 때 전후시대의 베를린 사람들이, 마치 그 사람들을 실제로 만난 듯 생생하게 그가 묘사한 인물들이 떠올랐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객관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존경과 사랑보다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들이다. 밀고자, 사기꾼, 술집 창녀, 밤무대의 가수, 등. 그러나 그 인물들을 대하는 화자의 시선에는 -그가 취하는 거리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거리 때문에- 은근한 애정이 엿보인다. 이 가엾은 인물들이 납득할 수 없는 어이없는 일들을 벌이는데도 그것이 삶이지, 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베를린 일기:1930년 가을」의 엔딩으로, 집주인인 슈뢰더부인이 세입자인 마이어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이 장면의 묘미는 여러 가지 층위의 오해가 겹쳐지는 지점에 있다. 일단 가장 전면에 드러난 오해의 차원은 슈뢰더 부인과 마이어 사이에 일어난다. 슈뢰더 부인을 달래는 마이어는 영문을 모르고 있다. 마이어는 “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한 거”냐며 울고 있는 슈뢰더 부인을 달래지만 상대가 왜 우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상황을 모르는 이에게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슈뢰더 부인에게 (또한 독자에게) 안도감을 준다. 혹은 위로하는 당사자 마이어도 의심없이 위로하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두번째 오해는 두 사람의 젊은 세입자가 비밀연애를 한다는 것 때문에 울고 있다는 사실이 ‘코스트 양이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난다’는 상황으로 위장된다는 점이다. “내 욕실에서 나오”라는 요구 사항의 속사정은 질투심이지만, 그 마음을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고 화장실의 문을 두드리는 사건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화자인 브래드쇼가 서술하는 것처럼 ‘슈뢰더 부인이 코스트 양에게 질투를 느꼈다’는 것이 정말 그녀의 최종적인 진심일까? 그녀가 울고 있는 진짜 이유일까? 독자는 이 장면을 슈뢰더 부인이 다시 한 번 진심을 숨긴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보비에 대한 질투심이 또 하나의 위장이며, 그녀가 운 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라고. 그녀가 흘린 눈물은 그녀 삶 전체에 대한 눈물이라고 말이다. 마이어 양이 슈뢰더 부인에게 “저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한 거예요?”라고 물을 때, 나는 이 소설의 서두 부분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이십년 전에 누가 나더러 마룻바닥을 닦으라고 했다면 따귀를 때려줬을 거야. 그렇지만 익숙해지지. 무슨 일에든 익숙해질 수 있어. 아, 이 요강을 비우라고 했다면 차라리 내 오른손을 자르겠다고 했을 시절도 기억나. 그런데 지금은,” 슈뢰더 부인은 그 말에 맞춰 동작을 하면서 말했다. “맙소사! 지금은 그냥 차 한잔을 쏟아버리는 일 정도밖에 안돼!” (15p)
잠겨 있는 화장실 문앞에서 터진 그녀의 눈물이 어쩐지 그녀의 외롭고 고달픈 현재에 대한 것으로 읽히고 마는 것이다. 슈뢰더 부인은 자신의 삶을 전혀 불평없이 받아들이며 세입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지만, 독자는 그녀가 얼마나 외로운지 그녀의 삶이 고달픈지를 실감하게 된다.
베를린 이야기에서 작가는 이렇게 인물의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지 않고, 반대로 다른 인물을 통해 인물들과 점점 더 멀어지는 방식으로 그 인물의 핵심을 보여준다. 나는 그것이 베를린 이야기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물들이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도 감정적 불편함 없이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 방식에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렇게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내가 앞서 언급한 다른 작가들, 인간의 모습을 낱낱이 해부하고 파고 들어가는 작가군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물의 가장 한가운데에 도달한다.
나는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분명 사람들과 지나칠 정도로 가까워지는 특성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다른 인물들을 통해, 클라우스가 쌜리 볼스에게 보내는 편지(“우리가 계속 함께 있게 된다면 당신은 자신의 의지나 생각이 없어져 버릴 거야.”)나, 베른하르트의 과거회상(난 지나치게 친하게 지내려 했거든요. 아이들이 그걸 알고는 내게 잔인하게 대했어요.“)을 통해 그 점에 대해서 (스스로에게든 독자에게든 암묵적으로) 경고하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자기 자신인 채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 타인과 너무 가까워지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은 분명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자주 곤란한 상황에 처하고 혼동에 빠지게 된다.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까지가 너란 말인가? 작가는 개인으로 살아남기 위한 한 가지 방식으로서, 타인의 삶에 연루되는 대신 스스로를 카메라로 지칭하며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선택했던 것이 아닐까. 잠시 머무는 국외자라는 화자의 위치는 그가 개인으로 살아남기 위한 가장 안전한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내 생각에 불과하다. 타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니까. 그래서 소통은 언제나 오해를 낳지만, 그 오해가 아니라면 세상은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소설가들이 소설을 쓰는 방식이 그가 존재하는 방식과 크게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조금 실망했었다. 예전에 나는 소설에 뭔가 더 신비로운 것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작용한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삶에도 이야기에도 여전히 내가 모르는 엄청난 것들이 도사리고 있어서, 어떤 방식을 통해서 ?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쓰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하더라도, 그런 방식으로 작업하고 싶지 않다. 나는 자신의 삶과 괴리된 이야기를 하는 작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받아쓰는 작가가 좋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글이 삶에 완전히 종속적이어서 언제나 결과의 자리에 나타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나는 글을 쓰는 방식이 작가의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한 장면 다음에 그 다음 장면이 있다’는 단순한 진실이 나에게는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순간에 매혹되거나 매몰되어 버리고 마는 근시안적인 성격이 변화하여 다음 순간을 고려하는 태도를 체득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에 내가 가진 글쓰기에 대한 막연한 환상보다 훨씬 더 멋있는 종류의 일이었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을 통해 내 삶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이러한 방식의 글쓰기를 붙든 채 가고 싶다. 삶과 글쓰기에 대한 낙관적인 궁금증을 가지고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나간다.
* 이 글은 2016년 12월 14일, 웹진 '소설리스트'에 실린 글을 재수록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