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마걸이었다.
첫째로 태어나 동생이 생기기 전까지 젖을 떼기가 힘들었다.
시골 친척집에 놀러 갔을 때는 동생들과 잘 노는가 싶다가도
밤이 되면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덩달아 동생들도 나를 따라 울부짖었고, 부모님이 다시 오셨다.
두분의 휴가는 무산되었을 것이다.
서너 살 아래인 동생들보다 유난스럽던 엄마집착증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다니는 대학을 그만두고 음악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는,
두분의 자율적인 교육철학에 비추어 반대가 없으리라 예상했는데,
역시나 반대가 없었다.
걱정이 냉소로 표출될 때도 있었지만 도움을 요청하면 지원해주셨다.
음악인으로 산 지 7년이 되는 해에,
이제 다른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엄마는 조심스레 물으셨다.
무슨 일이든 십년 이상은 해야 자리가 잡힌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씀드린 뒤 이듬해에 작업실을 얻었다.
두렵고 불안한 날들이었다.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무작정 집을 나왔기 때문에 늘 생활비가 모자랐다.
모든 것들이 적대적으로 느껴져 날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끼니는 왜 이리도 자주 찾아오는가.
집안일은 해도해도 끝이 없고, 앨범작업도 해야 한다.
서툴고 외로웠다.
그러나 다시 집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제는 내 몸 하나 돌보는 일이 제법 능숙해졌다고,
오래 걸렸어도 대견하다 스스로 칭찬하는 요즘이었다.
운전 중 라디오에서 「꽃길」(세정)이라는 노래가 들렸다.
엄마에 관한 곡을 두개나 만들었지만
그것은 순전히 나를 위한 작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일은 집에 가야겠다 생각하고 또 가지 못하는 오늘이다.
마마걸 기질로 발현된 문제는 누구나 한번쯤 거치는 통과의례일 것이다.
엄마와의 관계형성은 다 다를지언정 어른이 되는 과정은 비슷하다.
여전히 두렵고 외롭지만 나 자신을 조금은 알게 되었고, 예전만큼 서툴거나 낯설지는 않다.
다음에는 「꽃길」처럼 당신을 위한 곡을 만들어보리라.
그것보다, 내일은 정말 집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