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날 며칠을 아껴 읽던 존 버거(J. Berger)의 『A가 X에게: 편지로 씌어진 소설』(김현우 옮김, 열화당 2009)을 결국 다 읽었다. 얼마나 아껴 읽었는지, 뒷부분으로 갈수록 남은 분량이 줄어드는 것에 가슴이 미어졌다. 다 읽고 나서는 좀 울고 싶어졌는데, 누가 코끝에 고추냉이를 쑤셔넣은 것처럼 찡해졌다. 괴로웠지만 울지 않고 참았다. 어떤 밤에는 감정을 쏟아내지 않고 쟁여놓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런 밤이 있다. 마치 돈을 아끼듯 감정을 아끼게 되는 밤. 이 책을 다 읽은 뒤에 아모스 오즈의 단편을 더 읽고, 음악을 들으려 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을 다친 것이다. 어떤 책은 마음을 다치게 한다. 도저히 읽기 전의 마음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상처 나서 벌어진 틈새로 피가 고이고, 아물 즈음이면 결국 마음의 결이 바뀌게 되는 글. 이 소설은 정치범으로 독방에 갇힌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인이 쓰는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 한번의 면회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리움으로 야위는 여성의 말들이 담겨 있다.
“기대는 몸이 하는 거고 희망은 영혼이 하는 거였어요. 그게 차이점이랍니다. 그 둘은 서로 교류하고, 서로를 자극하고 달래주지만 각자 꾸는 꿈은 달라요. 내가 알게 된 건 그뿐이에요. 몸이 하는 기대도 어떤 희망만큼 오래 지속될 수 있어요. 당신을 기다리는 나의 기대처럼요.”
누가 마음을 채칼로 휙, 한번 그은 것 같다. 세로로 길게 찢어져 펄럭이는 내 마음. 존 버거의 글은 시를 향해 있다. 그는 아주 기다란 문장으로 시를 짓는 작가다. 어떤 작가는 자기 안에 시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자유롭게 이용한다. 그러니 독자의 코에 고추냉이를 시시때때로 발라넣는 것은 일도 아닐 테고.
당신을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것. 이게 기적이다. 책을 읽고 나니 지금 다른 곳에서 잠들어 있을 사람의 구부정한 등이 보고 싶다. 잠든 등을 사랑하는 것, 내 취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