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하나가 염리동으로 이사를 왔다. 당시 나는 여동생과 아현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이웃사촌이 되었으니 함께 산책도 하고 맥주 한잔에 밤새 수다도 떨자며 잔뜩 설렜다. 그런데 한두번 커피를 마신 것 외에는 친구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우리 걸을까, 물으면 늘 대답은 같았다. 골목길이 너무 어두워서. 당연히 핑계라 생각했고 어느날 퇴근길에 치킨 한마리 사들고 무작정 친구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웬걸, 아직 해가 저물지도 않았는데 골목길은 짙은 회색빛에 음산하기까지 했다. 어떤 곳은 길이 맞나 싶을 만큼 좁고 후미져서 치킨봉투를 가슴에 꼭 끌어안아야 할 정도였다. 겨우 친구의 얼굴을 마주하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번뜩 떠오른 생각, 집에 어떻게 돌아가지?
염리동은 그런 동네였다. 좀도둑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차가 출동하는 일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정도였다. 오죽하면 경찰이 귀갓길을 동행하는 ‘여성안심귀가서비스’도 염리동에서 처음 시작됐을까. 그런데 몇년 전 동네 풍경이 싹 바뀌었다. 새롭게 길을 깔거나 건물을 허문 것이 아니라 그저 골목에 색을 입히고 낡은 담장에 그림을 그려넣은 게 전부다. 어두컴컴한 골목 곳곳엔 노란색 가로등이 수십개나 새로 들어섰다. ‘소금길’이란 어여쁜 이름도 얻었다.
기억을 더듬어 친구가 살던 집을 찾아가니 대문 앞에 노란색 가로등이 세워졌다. 치킨봉투를 끌어안고 지나던 좁은 골목엔 귀여운 남자아이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 소소하지만 반가운 변화들을 친구에게 알려주고 싶어 전화를 걸었다. 어느덧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친구는 깔깔거리며 그 시절을 추억했다. 그리고 함께 고마워했다. 한동안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던 청춘의 후미진 구석, 샛노란 가로등이 우리의 어두웠던 시절마저 환하게 밝혀주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