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제목을 어떻게 하겠다고?
미인이요.
미인?
네 미인.
시인과 술을 마신 날이 생각난다. 왜 마셨는지 얼마나 마셨는지는 잊어버렸다. ‘단지 술이 그 자체로 좋았다.’ 연희창작촌의 내 방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적당히 취해 벽에 등을 기대고 이말 저말 했다. 그땐 시인이 첫시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는 시집의 제목을 ‘미인’으로 하고 싶다고 했다. 미인이라고? 나는 그 제목이 별로였으나 괜찮네, 괜찮네, 괜한 소리를 하며 계속 마셨던 것 같다. 그때 시인의 얼굴이 기억난다. ‘미인’이라고 말할 때 마다 그의 표정에서 슬며시 떠올랐다 사라지던 기이한 빛을. 슬픔과 그리움과 아름다움이 조금씩 섞여 물감처럼 풀어지는 그 표정.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다들 알겠지만 시집의 제목은 미인이 아니다.(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집을 읽어나갈 때 나는 이 시집은 미인이었지....... 라고 생각했다. 시집을 덮었을 때 어렴풋이 시인이 생각하는 미인이 무엇인지 그가 묘사하는 아름다운 사람이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산문집을 읽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시인은 울고 있었다. 엉엉 우는 건 아니고 눈물을 한 방울씩 찍어 문장에 섞어 쓰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이 책의 제목을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사람을 기억하는 자는 아름다워진다. 아름다운 사람과의 기억을 떠올리면 이 순간이 아름다워진다. 신비롭고 마법 같은 일이지만 동시에 저 먼 곳에서부터 끌려오는 슬픔과 쓸쓸함, 혹은 울음이 필요하다는 걸 시인은 알고 있었다. 그는 독자들에게 제안하고 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울어요,라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 말과 문장.
기억의 힘과 추억의 능력.
각자의 미인을 떠올리고 마침내 나 자신도 미인이 되는 기이한 경험.
근사한 책을 덮을 때마다 한장씩 아름다워지는 작가와 독자.
아름다운 세계의 아름답게 우는 원주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