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내가 쓴 글을 꺼내 보일 때마다 알몸으로 광장에 선 기분이 든다.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치부, 나의 어둠을 녹여낸 글일수록 더욱 그렇다. 오래전 어느 시 창작 강의실에서는 ‘너의 시는 너의 증상’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사람들에게 나의 증상을 꺼내놓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얼굴은 퍽퍽한 밀가루 반죽처럼 나날이 두꺼워져갔지만 속은 여전히 초조와 불안으로 들끓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난 뒤엔 내 이야기를 꺼내놓는 일에 조금 용기가 생겼다.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은『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이겠지만, 내게는 『멀고도 가까운』을 부적처럼 품고 다닌 시간이 더욱 길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온갖 불행의 실타래를 차근히 풀어가기 시작하는데, 그 솔직함과 지성의 힘에 매혹되어 한동안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에세이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철학서이자 심리학 서적, 문학비평서이면서 동시에 근사한 문학론이기도 하다. 젖을 물리는 어미 개처럼 작은 이야기들을 끌어안는 거대한 이야기의 힘으로, 그녀는 우리를 영롱한 사랑의 호수 앞으로 이끈다. 그 풍경의 전언은 온전한 ‘나 자신’이 되라는 것이었다. 거짓 위안이나 책임감이라는 망령에 사로잡히지 않은, 어느 누구의 딸도 아닌, 온전한 나 자신이 되라는 것.
책장이 너무 빨리 넘어가서 아깝다는 것 외엔 흠잡을 것 없는 책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건 무언가를 ‘쏟아놓을’ 장소가 아닐까. 그녀는 묻는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바통을 건네받은 당신, 이제 당신이 이야기를 털어놓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