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문학3』에서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발표되기 전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수록 예정작들 모두 처음 접하는 시인의 것이었지만
마치 음악하는 친구가 방금 만든 노래를 들려주는 듯 친밀감이 느껴져 재미있었다.
그중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은 두편의 시가 있었으니
이수명 시인의 「아무도 태어나지 않은 해였다」와 「에디야 커피」가 그것이다.
시어는 퍽 일상적이나 그 세계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고차원의 시공간을 그려냈다.
나를 압도하는 세계관이 궁금하여 몇권의 시집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대부분 ‘해설’을 지나치는데 이 책은 그럴 수 없었다.
읽을수록 궁금해졌다.
인터넷에서 검색도 해보았다.
시인이 쇼스타코비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주일 내내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와 피아노협주곡을 들었다.
바이올린 하는 친구에게 연주해보았느냐고 물어보니
대학시절 과제로 동기들이 바흐나 하이든을 선택할 때,
자신은 종종 쇼스타코비치를 연주했다고 한다.
친구는 피아노협주곡을 추천했지만 나는 현악사중주가 더 좋았다.
현악기는 피아노보다 한정된 음역대를 가지고 있는 반면 훨씬 다양한 주파수의 소리를 낸다.
조율된 음을 두드리는 피아노와 달리,
현악기에서 왼손의 운지와 오른손의 보잉(bowing)은 여러 층위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정교한 장치이다.
바이올린 두대와 비올라, 첼로가 만들어내는 각각의 사운드스케이프는
서로 조화를 이루거나 충돌하며 다차원의 음향 스펙트럼을 구사한다.
바이올린보다 피아노를 더 오래 배웠어도 현악기를 특히 좋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의 귀가 각 주파수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해서는 화성학으로 잘 정리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수명의 시는 그 너머의 무엇이 손끝에 닿는 느낌이었다.
현대음악이 만드는 낯설고 이상한 나라에서
재미를 발견하거나 체화되지 않은 감정들을 경험하듯,
나에게 시를 읽는 행위 또한 그러했다.
음악을 시작한 뒤로 텍스트에 탐닉해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