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을 좋아합니다.
서랍은 가장 숨기고 싶은 마음이기도, 내밀하게 웃으며 열어보고 싶기도 한 집의 한구석입니다. 때때로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고 싶어지는 나의 짓궂은 마음처럼, 내 집에 놓인 의외의 표정이기도 합니다. 좋아하기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기도 하지만, 또 좋아하기에 가장 안 보이는 곳에 두기도 하지요. 어렸을 때부터 오빠와 같은 방을 썼던 저는, 아무도 모르는 서랍에 좋아하는 간식을 숨겨두곤 했습니다. 숨겨둔 간식이 나도 모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요. 단지 그런 장소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웃을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나 하고 다 큰 어른의 마음으로 돌이켜 봅니다. 그 서랍은 저에게 유일한 집이자, 방이었어요. 손을 뻗어 잡아당기면 좋아하는 것을 만날 수 있는 나의 공간.
그렇기에 서랍은 한 권의 책을 닮았습니다. 책장에 꽂혀 있거나, 누워 있거나, 세워져 있는 책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열지 않아도 서랍이고, 펼치지 않아도 책인 이 두 가지의 닮은 점은 또 있습니다. 어떤 책과 어떤 서랍은, 어느 날 불쑥 쳐다보게 되는 날이 불현듯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날에는 그 앞에 고개를 떨구고 언제까지라도 앉아 그 안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을 위해 한 공간에서 서로 모른 척하며 지냈나 싶어집니다.
얼마 전 눈이 오는 날, 오래전에 사놓고 잊었던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책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나 또한 그랬는데, 생각이 아닌 마음으로 서로 가까워지는 날이었습니다. 그대로 고개를 떨구고 심야까지 책장을 넘기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장을 만났습니다. 서랍의 모든 면을 알아야만 잠이 오는 밤이 있지요. 그날은 작고 풍부한 세계 하나가 나의 집에 더해진 날이었습니다.
방에 두고 싶은 서랍을 자꾸만 그려봅니다. 어느 날 분명 필요할 이야기가 담긴 서랍을, 미리 준비해두고 싶은 마음은 오늘도 커집니다.
당신의 집에는 어떤 서랍이 있나요. 어떤 이야기로 서랍을 채우고 싶나요.
사랑하는 사람아
얼굴을 내밀어보렴
수면 위로
수면 위로
네가
떠오른다면
나는 가끔 눕고 싶은 등대가 된다
- 박연준 「서랍」, 창비시선 410 『베누스 푸디카』(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