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높이 날아오르는 저것은
실상 새가 아니라 새의 몸을 하늘로 불어날리는 천사의 숨이었던 것
강신애 「새 표본 전문가의 꿈」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
편지 봉투 속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를 넣었다 안녕도 없고 잘 지내도 없는 편지 한 장 받는 사람의 생각은 얼마나 넓어질까?
김준현 「내 생각」
내 안에 나는 얼마나 있는 것일까
내 속에는 가끔 내가 가득한 느낌이 들고 내 속에는 거의 나 이외의 것이 가득하지만 나와는 멀다. 멀리에 영영 있다.
안주철 「희미하게 남아 있다」
당신은 어떤 사진을 찍겠습니까?
이 세상 그 모든 노출과 그늘 아래서 이 맑고 많은 광원들 안에서 이 전부를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이게 오직 진짜는 아니더라도
채길우 「하품」
영양가 높은 햇살 맞으러 오세요
저이는 어찌 저리 환할까 기웃거리다가, 드디어 비결을 찾았어요. 날마다 맑은 햇살 푸지게 담아 드시더군요.
정우영 「햇살밥」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은, 길쭉한 사람이다 다리도 길고 목도 길고 뒤통수도 긴 사람이다… 제 삶이 어떤 건지 미리 한번 중간점검해보는 사람이다
유홍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은」
여름의 시간은 무한히 남아돌았다
한낮에는 잠에 빠져 서 있고 한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누워 있었다 세상 모든 책을 펼쳐놓고 꿈에서도 보고싶었다
김현 「펜팔」
무엇을 부수어야 사랑이 되나
이 모든 것을 품고 넘어야 사람은 사람이 되나 사람을 넘는 사람 미안하게도 사랑을 부수어야 사랑이 되나
김승희 「나를 부수는 나에게」
다 무너지지는 않던 마음
낙엽 위로 악착같이 기어나오던 풀꽃처럼 젖어오던 마음 살 것 같던 마음 반짝이며 반짝이며 헤엄쳐 오던, 살 것만 같던 마음
이영광 「어두운 마음」
빗소리 들리는 여름 아침
무슨 슬픔 쌓아두었기에 우리 사는 여기 파도에 휩쓸리는 해초처럼 일렁이고, 바퀴들 닿지 못할 곳으로 달려가고 있는지요
최정례 「여름 아침」
가만히 누워 있는 게 좋다
주말 오후 마루에 누워 듣는 비행기 소리가 좋다
황유원 「에어플레인 모드」
나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어요
봄은 가고 여름이 와요 그 여름에 당신은 없어요 망설이지 말라고 말해주는 당신은 없어요
유병록 「망설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