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이라는 말이 좋아
불쑥 오는 버스에 올라 불쑥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 그런 일이 좋아
박소란 「불쑥」
밤의 수영장에 혼자 있었다
보름달이 너무 크고 밝아 네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황인찬 「비역사」
오늘은 보름달이 살아나는 날
야아 달이 살아났네 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 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
김해자 「월식」
궁금해 저 나무의 희망이
작은 호수의 가슴을 지나 양털 깎던 곳의 지붕을 지나 어디까지 저를 넓혀 누군가의 그늘이 되고 경이가 될지
박라연 「언젠가 너를」
휴일의 도시를 거닌다
가는 곳마다 문을 닫아 잔뜩 남게 된 시간을 길 따라 그냥 쭉 걸었다 너와 함께였다 우리가 함께한 첫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황유원 「휴관」
생의 강물이 흘러간다
의미가 있는 걸까 의미가 없는 걸까 무심한 격랑과 무차별 속으로 강물이 흘러간다
최정례 「입자들의 스타카토」
혼자의 탄생
새들은 나만 빼고 어디로 다 데려가는지 처음부터 혼자는 그렇게 탄생했을지도.
정현우 「소라 일기」
모과를 생각하는 오후
모과가 썩어간다 모과가 무너진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도 모과는 노랗다 싱싱하다
이근화 「모과」
작고 투박한 질그릇 조각
가만가만 만져보다가 가만히 눈을 감고 마음을 순하게 할 적에도 여간 요긴한 게 아니다
박성우 「질그릇 조각」
입춘, 빛을 모아주세요
어둠이 되어버린 허공의 빛을 잡아주세요, 그리고 누구에겐가 전해주세요, 꼭 한다발의 빛을
고형렬 「빛을 모아주세요」
시간의 뿌리는 썩지 않는다
사랑과 고통의 뿌리로 절망과 희망의 뿌리로 영원히 뻗어나가 시간의 나무로 자랄 뿐이다
정호승 「시간의 뿌리 」
까치설날 아침입니다
당신의 고집센 나무로 살겠습니다. 나뭇잎 한장만이라도 당신 쪽으로 나부끼게 해주십시오.
이정록 「까치설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