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바다를 보고 있습니까
물이 들어오는 때의 바다였고 아직 갯벌인 바다였지만 바다는 그 어떤 바다도 아니었다. 바다는 그냥 바다구나.
윤유나 「그냥 바다」
빨래집게는 운명을 견딘다
얼마나 두려우랴 위태로우랴 디딜 곳 없는 허공 흔들리는 외줄에 빨래 홀로 매달려 꾸득꾸득 마르기까지
박규리 「빨래집게」
추위를 이겨내는 펭귄처럼
펭귄들은 시린 바람과 흩날리는 눈발에도 고개를 젓고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흔들리는 겨울을 견디고 있다.
채길우 「배추밭」
한 번 더, 12월
한 해가 어찌 이리 가 버렸나 곱씹어 봅니다 들어야 할 말들을 듣다가 너무 많은 말을 들어서 내 맘속 말은 하나도 못 들었나봐요
권창섭 「한 번 더, 12월」
누비이불처럼 잠들지 못하는 밤
따뜻하게 혼자서 번영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다면 벽이 되고 싶다 침묵할 수 있다면 새가 되고 싶다
이소연 「앨리스의 상자」
초록들이 살다 가는 나무라는 집
다시 환해지는 집 그 속으로 멈췄던 숲의 계곡이 흘러들어 막 씻어낸 시간이 하얗게 태어나는 집
박승민 「소멸의 집」
서커스 같은 일상
세상을 한번 뒤집어야 하는데 허구한 날 자기 속만 뒤집어진다는 동료 사무실 빈자리에서 도깨비불이 날아다녔다
이동우 「서커스」
꿈에서 깬 새벽녘에 홀로 앉아
완강한 세월에 떠밀려 깊은 골짜기 너머 호젓이 핀 산수유꽃 같더니 꿈길로 나그네 되어 찾아와 흘러가버린 세월의 뒤만 덧없이 밟고 가는가
나해철 「꿈 깨인 새벽」
오늘도 세상을 공부합니다
종소리 하나를 아는 것이 다른 소리 백번 듣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게 하지요 새의 가벼운 몸짓을 배우는 것이 몸만 있어 무거운 나에게는 큰 공부이지요
천양희 「새와 종소리」
첫눈 올 것 같은 날
유리창을 움켜쥐는 바람의 손바닥들 오늘은 그가 아무리 작게 두드려도 심하게 흔들릴 것만 같다
이영광 「첫눈」
울 마음이 없어서 웃는 사람
멀쩡하게 세수를 하고,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과 어깨를 치며 걸어볼까. 문질러도 흐릿해지지 않는 얼굴을 하고서
정다연 「지금은 상영할 수 없습니다」
서서히 물드는 사랑
들리지 않니? 세상천지에 불 켜는 소리, 달이 둥글게 돌아 네게로 오는 소리
이승희 「관계, 물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