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을 시작하며
손을 다시 보자 입과 귀와 눈 머릿속을 다시 보자 몸을 보고 또 보자 쉬운 것들이 쉬워질 때까지
이문재 「쉬운 것들」
어떤 흐린 날
잿빛 구름 잔뜩 뿌려 놓고 하늘이 어디 갔어요. 가끔은 하늘도 쉬는 날이 필요해.
정유경 「흐린 날」
위태로운 마음들이 쌓여간다
가라앉히려 해도 끝내 가라앉지 않는 것이 있다 물속에 밀어 넣어도 한사코 튀어나오는 풍선처럼
신철규 「약음기」
앉아 있는 나무를 봤어요
그루터기나무는 어데 멀리 간 것이 아니라 숲이 내준 환한 슬픔의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해요
최창균 「앉아 있는 나무」
신비가 아니라면
무슨 힘으로 저 산 넘고 또 넘겠나 신비가 아니라면, 지금 이 산이 다 무슨 소용 있겠나 산 없인 살아도 신비 없인 살 수 없는 사람아!
박규리 「산, 신비」
우리가 지도를 탈출했을 때
바람은 바람을 키우고 불어온다 철봉이 하늘을 외칠 때 우리를 멈추고 구름을 생각해 아침을 찢고 새가 열리는 음악을 생각해
유이우 「어린 우리가」
오래 바라보던 그 저녁 물빛
괴로워하지 마라, 물 위를 흐르던 청둥오리떼가 저를 찾아 날아갔을 뿐이다
박영근 「십일월」
내 슬픔의 속내를 본다
몸 전체가 눈알인, 눈알 하나가 곧장, 쏟아지기 직전의 눈물 한 동이인 울긋불긋 차갑고 축축한 내 슬픔의 속내를 빠안히,
류인서 「알」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바람을 탄 채 바람에 저항하며 스스로 방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김선우 「새처럼 자유롭고 싶다고? 」
단풍의 의미
한 잎 한 잎 모여 단풍을 만든 거구나 내 지나온 삶 얼룩투성이여도 고운 단풍 만들 수 있는 거구나
정연철 「단풍 1」
사랑은 새를 기르는 일보다 어려웠다
돌아누운 등을 끌어안고서 아직은 아무 일도 피어나지 않을 거라 말해주었다
최백규 「수목한계」
우리, 모여서 만두 빚을까요?
능숙한 손에 몸을 맡기면 이렇게 그럴듯한 만두가 태어나는 법 사람 일도 마찬가지 차근차근 배우고 조심조심 따라 해서 나쁠 것 없는데
유병록 「우리, 모여서 만두 빚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