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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백. 은희. 선희. 나의 세 고모는 경기도의 한 도시에 모여 산다. 둘째인 은희가 20년 넘게 살고 있는 동네 근처로 막내 선희와 첫째 송백이 차례로 이사 온 것이다. 세 사람의 집이 어느 정도 가까운가 하면 알딸딸한 술기운에도 걸어서 충분히 집에 갈 수 있는 정도다. 그중 은희가 사는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짜리 빌라로,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방학 때마다 놀러 갔던 곳이라 지금도 은희의 집 풍경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
10여 년 만에 그 집에 다시 가본 것은 작년 봄. 그러니까 세 번째 산문집을 출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북토크가 있어 서울에 갔던 날, 세 고모가 번갈아가며 전화를 해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룻밤을 자고 가라고 했다. 바로 집으로 내려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이번에도 가지 않으면 고모들이 정말로 서운해할 것 같아 기차 시간을 하루 늦췄다. 일정을 마치고 금요일 오후 늦게 고모들이 사는 동네에 도착했다. 저녁부터 장사를 시작하는 첫째 고모는 이미 출근을 한 후였고,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둘째 고모와 막내 고모는 여섯 시에 퇴근을 한다고 했다. 일 마치면 바로 갈 테니 먼저 집으로 가 있으라고.
오랜만에 와본 은희의 집은 역시 그려본 그대로였다. 시간이 지난 만큼 전보다 외관은 낡아있었지만, 옆 동 할머니가 상추를 심어둔 화단의 모양이나 빌라 단지에 내려앉는 오후의 빛까지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서니 정면으로 작은 창문과 싱크대가 먼저 보였다. 거실에서 저 작은 창문이 가장 밝아 보이던 것도 기억이 났다. 사촌동생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집안 곳곳을 둘러보았다. 깨끗하게 정돈된 욕실과 안방에 놓인 서랍장과 행거, 텔레비전, 선풍기의 위치도 여전했다. 그중엔 내가 중학생이던 때도 “이걸 왜 샀을까?” 궁금해했던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황금색 돼지 모형 두 마리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검소하고 부지런한 은희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집이었다. 입버릇처럼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지겨워” 하면서도 눈앞에 머리카락 하나도 떨어져 있는 걸 두지 않고, 구석구석 먼지 하나 없게 잘 닦아내는 집. 하지만 그날따라 그런 은희도 어쩌지 못하는 집의 낡음이 눈에 잘 보이기도 했다. 안방의 천장과 문지방에서, 욕실의 바닥과 세면대에서. 오래된 셔츠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람의 양말 뒤꿈치가 해져 있는 걸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집에서 가장 새것인 물건은 내 책이었다. 서랍장 위에 놓인 여러 권의 책 중 하나. 초록색의 산뜻한 표지가 무안하게 느껴질 만큼 눈에 띄었다. 평소엔 책을 살 일이 없어 10년 전 고등학교 교과서가 그대로 남아 있는 사촌동생의 책장에서도 내 책만이 말끔했다. 누나 돈 벌게 해주려고 직장 동료 열 명에게 책을 사게 했다며 으쓱해하던 사촌동생의 말이나 고모의 친구들도 몇 권씩 사서 읽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매번 가족들에게는 자랑스러운 베스트셀러가 되는 나의 책들.
은희와 선희가 퇴근해서 돌아올 때까지 사촌동생 방에 누워 기다리기로 했다. 이 방이 이렇게나 작고 좁았나 싶게 한 사람이 눕기에 딱 맞았다. 편한 자세로 누워 은희가 공장에서 한다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언젠가 고모에게 출근하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네가 말하면 알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알 수도 있으니 말해보라 했더니 은희는 PCB 조립을 한다고 했다. 하루 종일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은희의 말대로 역시나 나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문득 그가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하는지 자세하게 그려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희는 내 책을 읽고 내 삶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을까.
일을 마치고 돌아온 은희, 선희와 동네에서 인기가 좋다는 삼겹살집에 가서 고기를 사 먹었다. 사람도 많고, 불판에 구워지는 고기도 많아서 오래 머물지 않았는데도 기름 냄새를 잔뜩 끼얹은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은희는 오르막길을 오를 때마다 자꾸만 “아이고 허리야”라고 했다. 안 그래도 약한 몸인데 최근에 크게 한번 아픈 이후로 살이 더 빠졌다더니 등이 부쩍 말라 보였다. 요가를 배워보라고 했더니 아침이면 출근하기도 바쁜데 무슨 요가를 하겠느냐고, 은희는 대신 네가 책을 대박 내서 호강 좀 시켜줘 보라고 했다. 이번 책이 잘 팔리면 새 집을 하나 사달라고. 미안하지만 앞으로도 집을 사줄 만큼 대박 날 일은 없을 거라고, 꿈 깨라는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고모들과 한집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엔 일찍 눈을 뜬 두 사람과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갔다. 집 앞에 있는 식당인 줄 알았는데, 길 하나를 건너 세로로 긴 시장 하나를 지나야 했다. 반들반들한 파프리카와 직접 다듬어 한 소쿠리씩 파는 깨끗한 도라지. 산지에서 직접 가져왔다는 감자. 그 옆에 체리. 갈치. 백설기. 미숫가루. 떡볶이. 닭꼬치들. 부지런히 장사를 시작한 사람들과 이른 시간부터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을 비껴가며 15분을 걸었다. 시장을 벗어나 도착한 24시간 콩나물국밥집엔 벌써 등산을 마쳤는지 등산복을 입은 한 무리와 불콰하게 얼굴을 붉힌 중년 남성 여럿이 소란스레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은 우리는 아침부터 다들 부지런하다는 농담을 속닥이면서 쪼그라든 깍두기와 국밥 한 그릇을 비웠다.
식당을 나오니 아직 열 시가 되기 전이었다. 왔던 길을 돌아가 커피 한잔을 하고 집을 나서면 기차 시간에 늦지 않게 역에 도착할 듯했다. 느긋한 걸음으로 다시 시장에 들어서려는데 은희가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다며, 다급히 어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어디 가는 거야?' 하고 은희가 간 곳을 보았다. "언니. 내 것도 사야 돼." 은희를 따라 선희도 함께 들어간 곳은 2등 당첨자가 여럿 나왔다는 복권 판매점이었다.
두세 평쯤 되는 판매점 안은 신중하게 번호를 고르는 사람과 복권을 구입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복권을 사려고 기다리는 익숙한 얼굴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언젠가 복권을 사는 오천 원은 복권 값이 아니라 설렘 값이라고 했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오천 원으로 일주일을 설렐 수 있다면 복권의 효용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느냐고.
"자. 너도 하나 가져."
조금 뒤 복권 두 장을 손에 쥐고 나온 선희가 한 장을 나눠주었다.
"그러다 내가 당첨되면 어떡하려고?"
"당첨되면 잠수 타."
"잠수 타라고?"
"엉. 잠수 타도 되니까 꼭 대박 나."
선희의 말에 은희도 “그래. 너 혼자 잘 살아”라며 웃었다. 이 사람들은 왜 자꾸 혼자서 잘 살라는 거야. 그 말에 정말 그래도 되냐고, 나는 고모들이 당첨되면 내 몫도 떼 달라고 할 거라고 했더니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그래라. 그럼."
"농담이야. 고모도 잠수 타도 안 미워할 테니까 꼭 대박 나."
"그래. 너도 대박 나."
"엉. 대박 날게."
우리 중 한 사람이 대박 나면 잠수 타기. 그건 아무래도 이상한 다짐이었다. 시장에 들어서자 세 사람이 나란히 걷기엔 좁아 일렬로 걸었다. 그사이 시장엔 늦게 문을 연 가게들과 찬거리를 사러 나온 사람들이 늘어나 있었다. 아직 결과를 알 수 없는 복권을 손에 쥐고서 사람들이 오징어와 파프리카를, 얇은 잠옷 바지를 구경하는 모습을 보며 걸었다. 평범한 오전이라는 말로 불러보기 좋은 날이었다. 그러다 한 자리에 쪼그려 앉아 감자를 구경하는 낯선 사람의 등을 지나면서 생각했다. 손에 쥔 복권이 당첨된다면 선희와 은희가 조금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갈 수 있도록 보태줄 것이라고. 그러면서도 두 사람 중 어느 하나가 당첨이 된다면 홀연히 사라져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얄미워질 때도 있고, 어떻게 사나 궁금해질 때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생각하는 대박이 두 사람의 삶에 찾아온다면 좋을 것이라고. 그러면 얄밉고 궁금해져도, 깨끗하고 커다란 새 집에서 두 다리 뻗고 쉬고 있는 은희와 선희를 생각하면 참나 하고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러니까 꼭 대박 나. 혼잣말 같은 생각을 하며 걷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어제 본 갈치보다 여기가 더 싸. 이거 사.” 은희를 붙잡는 선희의 목소리였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은희가 한 손에 지갑을 들고서 통통한 갈치 한 마리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게. 물건도 여기가 더 좋네.” 번개에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희귀한 행운을 바라는 사람들답지 않게, 더 저렴한 갈치를 발견한 작은 행운에도 걸음을 멈추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잠수를 탈 만큼 대박은 아니더라도, 저렇듯 잘게 잘게 쪼개진 행운이 그들의 평생과 아무렇지 않게 함께하기를. 시장 한가운데 서서 그런 상상을 했다.
내게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는 노트가 있다. 내가 이 삶을 계속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준 말들을 모아둔 노트다. 지금껏 쓴 많은 글들이 이 노트에서 시작되었다. 다음에 쓰게 될 글 역시 여기에 있다. 세 권의 산문집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작별 인사는 아직이에요』 『나의 두 사람』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