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을 위한 미술교육 콘퍼런스에 간 날이 생각난다. 보통의 미술교육은 미술 심리나 아트 테라피, 창의 미술에 키워드를 두고 일반적인 친구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예방 차원에서 이뤄진다. 반면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미술교육은 치유 차원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의 세미나는 앞부분에 등장하는 질문부터 충격적이었다. 그 질문의 모든 단어가 또렷하게 기억난다.
“선생님? 예쁜 게 뭐에요? 왜 사람들은 누구는 예쁘다 하고, 누구는 안 예쁘다고 해요? 어떻게 생긴 게 예쁜 거고, 어떤 건 안 예쁜 거예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멋지게 표현해보자. 예쁘게 칠해볼까?”라는 질문을 남발했던가. 그런데 예쁜 것과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이 없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너무나 불확실한 것투성이였다. 그날 이후 나는 교육에서건 삶에서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정해진 것 또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상을 볼 수 없거나 어렴풋이 겨우 보는 아이들도 미술을 촉각으로 느끼고 청각으로 대할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워했다.
?신체에서 무엇 하나가 부족해지는 사건은 나머지 부분들이 더욱 가치 있어지는 기회를 준다. 흑인과 인디오의 피가 섞인 시각장애인 작가 호킨스 볼든(Hawkins Bolden, 1914-2005)도 마찬가지였다.
8살 때 쌍둥이 형제가 휘두른 야구 방망이에 맞는 사고로 시력을 잃은 호킨스 볼든은 뇌까지 크게 부어 수술 과정에서 머리가 드릴에 뚫리는 경험을 한다. 이 어린 시절의 경험은 훗날 작가의 작품 속에 수많은 드릴링의 형태로 투영된다. 8살 이후 아무것도 보지 못한 그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처럼 느낀다. 소년은 쓸모가 있어지기 위해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는 무엇인가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만든 것이 새를 쫓는 ‘허수아비’였다. 그의 허수아비는 어느 날은 사람의 얼굴처럼, 어느 날은 큰 꽃 한송이처럼 표현된다. 촉각으로 세상을 느낄 수밖에 없어서 작품의 형태는 완결성이 높거나 밀도가 치밀하지 않다. 그의 작품에서 우리가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여러 구멍과 혓바닥처럼 보이는 패브릭이다. 얼핏 보면 눈코입의 얼굴이지만, 사실은 ‘세 개 또는 그 이상의 눈’을 가졌다. 눈을 만드는 이유에 대해 그는 ‘내 작품이 잘 보이게 해주려고 두 눈을 만들고, 전체를 보는 눈을 하나 더 만든다’라고 했다. 즉 그의 작품에는 늘 더 넓은 시야를 가진 ‘예술가의 눈’이 하나 더 존재한다.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 중 하나인 폴리페모스(Polyphemus)는 한 눈으로 세상을 봤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님프가 다른 이를 사랑하자 질투에 눈이 먼 나머지 사람을 죽이고 만다. 이 신화 속 이야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눈의 상관관계에 대해 넌지시 일러준다. 눈이 하나인 것이 눈이 없는 것보다 위험하다. 한쪽의 세상만 있다고 믿는 사람이 세상을 아직 모르는 사람보다 더 위험하다는 뜻이다.
익살스러운 표정에 둥근 눈들, 길게 축 늘어뜨린 큰 혀… 그는 작품에 ‘행복한 얼굴’이라는 제목을 자주 붙였다. 호킨스 볼든은 보지 못했지만, 마음속에 눈이 가득했다. 예쁘고 예쁘지 않은 것의 기준은 몰라도 만질 수 있는 미술을 너무 사랑하는 시각장애인 친구들처럼 호킨스 볼든은 우리보다 더 깊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어루만졌다. 그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평생 동안 창작의 태도에서 배운 듯하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예술가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표정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그런 기회들 때문에 ‘예술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라는 명제에 자주 도달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미술교육 세미나에서 또 하나 잊히지 않는 문장이 있었다.
“저 사람이 못 보기 때문에 내가 잘 보는 것이다. 누군가는 나 대신 시각을 양보했고, 누군가는 나 대신 건강을 양보했다.”
세상에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어도 우리 중 누군가는 부족한 신체로 태어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세상에 특별히 잘한 것 없는데도 부족함 없이 태어난다. 나는 호킨스 볼든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대신 볼 수 있고, 내가 못 본 세상을 그를 통해 오늘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