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0년(영조46)~1847년(헌종13). 조선 후기의 서예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원(允遠), 호는 창암(蒼巖). 어린 시절에 당대의 명필이었던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다.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으나 글씨에만 몰두하여 가산을 탕진하였고, 병중에도 하루 천자씩 쓰면서 “벼루 세 개를 먹으로 갈아 구멍을 내고야 말겠다.”고 맹세하였다 한다. 그의 글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연히 한 상인의 장부를 쓰게 되었는데 그 상인이 귀향하여 감상가에게 보이게 된 것을 계기로 필명이 높아졌다고 한다. 초서를 잘 썼으며 그의 서체를 창암체라 하였다. 전라도 도처의 사찰에 그가 쓴 편액을 볼 수 있다. ≪제현가영(諸賢歌詠)≫에 그의 시조 1수가 실려 전한다.